2000년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4K 리마스터링 재개봉으로 되살아난 한국 누아르의 원형입니다. 게릴라 촬영과 형제 캐스팅, 그리고 지금도 유효한 분노의 에너지까지, 그 진짜 가치를 짚어봅니다.
2000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한국형 누아르 영화의 시작점이자, 당시 한국 독립영화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입니다. 2019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하면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와 감정을 전달하며 새롭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폭력, 청춘, 분노, 무기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둔 이 영화는, 당시 청년 세대의 불안과 좌절을 날것 그대로 담아내며, 거친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조명합니다. 형식보다 감정이 우선이고, 미학보다 생존의 현실이 더 가까운 이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자아냅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한국 사회에서 감정의 해소 방식이 얼마나 거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오늘날 누아르 장르의 원형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관객들 앞에 선 이 영화는, 단지 복고가 아닌 동 시대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총제작비 6,500만 원. 이 수치는 지금 보면 상상도 어려울 정도의 저예산입니다. 하지만 이 숫자가 오히려 창작자들의 상상력과 실행력을 자극했습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허가받지 않은 촬영, 친구 아버지의 당구장, 조감독의 주차장 등, 생활 속 모든 장소를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한 게릴라 식 방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장면조차도 사전 허가 없이 촬영됐다는 일화는, 독립영화 제작 환경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인물의 얼굴과 대사에 집중하면서도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류승완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에너지 덕분이었습니다. 주연을 맡은 류승범 역시 영화의 리얼리즘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댄서 출신으로 신체 감각이 뛰어난 그는, 카메라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본능적으로 연기를 해냈습니다. 오랫동안 알려진 루머인 '형이 억지로 동생을 캐스팅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감독이 직접 진행한 오디션을 통해 선택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두 형제의 영화적 운명을 결정지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9년 재개봉된 4K 리마스터링 버전은 단지 화질을 개선한 차원을 넘어, 과거의 영화적 감각을 현대적으로 복원한 의미 있는 시도였습니다. 화면은 더 선명해졌지만, 인물들이 가진 거친 감정과 서사는 오히려 더 깊게 전달되었습니다. 특히 어두운 골목길, 낡은 골조의 건물, 비에 젖은 도심은 4K의 힘으로 더 생생하게 살아났고, 관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경험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관객은 '화면은 더 깨끗해졌지만, 인물의 분노는 여전히 날것 그대로였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재개봉한 진짜 이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 세대가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사회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 점이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 영화는 단지 과거의 작품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리마스터링으로 시각적으로 복원된 것 이상으로, 감독과 배우, 제작진이 남긴 영화적 정신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국 누아르 장르의 기원이라는 타이틀은 단지 미화된 평이 아닙니다. 사회의 바깥에 있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들의 분노와 두려움, 사랑과 상처를 거침없이 그려낸 이 영화는 여전히 동시대적입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20년 전 영화지만, 지금 우리의 삶을 여전히 날카롭게 비추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리마스터링 스크린 속에서, 청춘의 분노와 진심이 고스란히 살아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치열했고, 무모했지만 진심이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이번 재개봉을 극장에서 꼭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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